동일본대지진 2009년, 15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기억해 본다.
2023년 오늘, 동일본 대지진으로 촉발된 원전 오염수 방류문제가 동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적인 이슈가 되었다.
국가들은 그 내부에서도 자국의 이득에 따라 안정성을 과시하거나 불신하거나 끊임없는 대립 각을 세우고 있는 형국이다. 이미 많은 전문가들과 정치와 민간에서 이 문제를 가지고 다투고 있는 상황이다.
얼마전 작고한 사카모토 류이치는(~2023) 암투병을 하며 원전 반대운동을 해온 이력이 있다.
동일본 대지진은 정치 사회를 넘어 예술가들의 심경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쓰나미라는 자연 재해 앞에서 문명화 된 세계의 성취로 추앙받던 차와 빌딩들은 추풍낙엽처럼 스러지고 소멸했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자전적 영화 코다에서 류이치는 물이 빠진 후쿠시마의 버려진 그랜드 피아노를 매만지며 소리를 채집했다. 쓰나미가 할퀴고 간 그랜드 피아노의 음색은 탁한 굉음을 냈다. 이는 울부짖는 자연의 소리를 대변하는 것 같았다. 소리. 나에게 소리는 형태와 색으로 다가오곤 했다. 또 형태와 색은 감정과도 연결되어있다.
같은 말로 소리와 감정과 이미지는(형태와 색) 동등한 체널을 공유하고있다는 의미다.
해서 류이치의 작곡과정과 나의 미술 창작과정은 흡사한 지점이 매우 많다.
그가 자연에서 여러가지 소리들을 채집하고 섞어내는 과정은 내가 자연에서 풍경을 채집하고 다시 편집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류이치가 사회운동으로 말하고자하는 메시지와 류이치가 작곡으로 말하고자하는 메시지는 얼마만큼 정교하게 일치하고 있을까.
또 나의 세계관과 자연관은 내 작품으로 얼마만큼 정교하게 제시되고 있을 까.
고민해볼 문제다.
쓰나미와 폭우에 범람하는 피목과 배들이 단지 기후변화에 대한 경고로 읽혀지는 것은 아닐까.
인간이 이상을 탑제함으로서 거인이 될 수 있음을 말하려는 나의 의도가 얼마나 정교하게 제시되고 있는지
생각해볼 문제다. 좋은 작업이란 미술을 알지 못해도 이미지만으로 그 의도를 알아챌 수 있도록 해야하는 것이다.